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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이야기/책 감상문 (코딩 이외의 서적)

우주의 먼지로부터

by 김판다t 2026. 2. 4.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8629634

 

저자: 앨런 타운센드

번역: 송예슬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5-11-21

 


가장 처절한 질량 보존의 법칙

아내의 숨결을 구성하던 원자들은 단 한 개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우주로 흩어졌을 뿐이다.

 

줄거리

 

생물지구화학자 앨런 타운센드는 인생에서 가장 정교하면서도 가혹한 수치와 맞닥뜨린다. 사랑하는 어린 딸과 아내가 거의 동시에 뇌종양 판정을 받을 확률은 약 1,000억분의 3. 이 거대한 불운 앞에서 그는 과학자로서의 이성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무너져가는 일상을 바라보며, 인간을 이루는 원소들이 결국 별의 폭발에서 비롯되었고 죽음 이후에도 다시 우주의 순환 속으로 돌아간다는 사실, 곧 '원자 수준의 불멸'을 통해 내면의 안식을 찾으려 한다.

 

 

 

객체의 소멸, 원자의 불멸: 그것은 과연 '우리'인가?  

저자는 아내의 죽음 이후, 그녀를 이루던 탄소와 질소가 자연으로 돌아가 원소의 불멸을 이룬다고 믿으며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객체 동일성(Identity)의 관점에서 볼 때, 원자 수준의 불멸이 과연 의미 있느냐는 의문은 남는다. 우리를 '우리'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원자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특정한 배열로 결합해 형성한 분자적 구조와 그 안에 담긴 정보(기억, 감정, 인격)이기 때문이다. 아내를 이루던 질소 원자가 훗날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한들, 그것을 아내의 연속성이라 말할 수 있을까? 원자 수준의 불멸 속에서 ‘나’라는 유일무이한 객체는 이미 소멸해 있다. 원자의 불멸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실체 없는 껍데기를 붙잡는 공허한 위안일지도 모른다. 저자 역시 나비가 번데기 속에서 액체로 분해되면서도 기억을 유지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던가.

 

 

두 가지 종류의 과학: 도구와 세계관 

타운센드는 과학을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데이터와 수치를 통해 세상을 분석하는 ‘도구로서의 과학’, 다른 하나는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근본적 틀로서의 '세계관으로서의 과학'이다. 엄밀히 말해 과학의 본질은 끊임없는 가설 설정과 엄격한 증명 과정에 있다. 그러나 저자가 주장하는 ‘원자 수준의 불멸론’은 이러한 논리적 증명 절차가 생략된 채 결론만 반복된다. 이는 과학이라기보다 확증 편향에 기초한 도그마(Dogma)에 더 가깝다. 그가 이토록 ‘과학’을 집요하게 강조하는 역설적 이유는, 오히려 자신이 지금 과학자의 영역을 벗어나 비이성적 믿음에 발을 들이고 있음을 방어하려는 심리적 기제일 것이다.

 

 

분자와 원자

필자는 지극히 지성적인 과학자이기에, 원자 수준의 잔존(물질의 순환)과 객체의 아이덴티티가 유지·계승되는 상황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는 객체의 아이덴티티가 유지된 채 변화하는 과정을 '분자 수준의 변화'라고 명확히 분리해 표현했다. 

삶을 끝내기 직전까지 갔었던 사건이 분자 수준에서부터 나를 바꿨다. - 19장 우주먼지
밤나무들은 겨우 버티며 분자 수준에서부터 달라질 그날을 기다린다. 그 변화를 통해 제자리를 되찾을 것이다.
- 19장 우주먼지

 

저자는 아내의 의식과 사랑이 분자 구조의 파괴와 함께 영원히 사라졌음을 인지한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원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분자적 상실이 남기는 압도적인 허무를 견디려고 일부러 시선을 미시적 원자 단위에 고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진실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실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선택적으로 관점을 취한 결과다.

 

 

세상에서 가장 처절한 질량 보존의 법칙

결국 이 책은 과학 서적이라기보다,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는 한 무신론적 과학자가 써 내려간 '과학적 영성'의 기록이다. 신을 믿지 않는 그에게 죽음은 절대적인 소멸이어야 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잃는다는 사실은 그의 사고를 다른 방향으로 틀게 했다. 그는 종교 대신 과학의 언어를 빌려 자신만의 성전을 세운다.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 남는다는 믿음은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상실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가장 처절한 몸부림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종교적 언어를 "너는 우주 먼지니 우주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과학적 언어로 치환한 것뿐이다. 원소는 불멸하고 질량은 보존된다는 물리 법칙에 매달려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견뎌내는 저자의 모습은, 가장 처절한 형태의 지적 투쟁이다.

 

 

 


번외 1.

 

저자는 어린 딸 네바가  "내가 아파서 엄마도 아픈 거야? 내 병이 엄마한테 옮아간 거야?"라고 물었을 때, 가슴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도 과학자로서 인과관계(Causality)와 상관관계(Correlation)의 차이를 떠올린다.

통계학에서는 흔히 '죠스 피해와 죠스바의 판매량'의 상관관계를 예로 든다. 두 수치는 함께 움직이지만, 죠스바의 판매량이 죠스를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여름이라는 공통 원인이 존재할 뿐이다. 저자가 떠올린 이 구분은 수강생들에게도 인과와 상관의 차이를 설명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번외 2.

 

다이애나가 아직 가정을 꾸리고 있던 앨런에게 던진 마티니 관련 이야기는 플러팅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마티니를 주문하는 것을 보고 에스콧 타이를 착용하지 않았다며 슬며시 놀린 것은 단순히 대화의 티키타카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며칠 뒤 그에게 이번에도 마티니를 시킬 것이냐고 묻는 장면은 ‘콜백’이라는 의도적 플러팅으로 해석된다. 개그는 반복과 변주 속에서 상대의 말을 되돌려주며 관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앨런이 “에스콧 타이를 착용하지 않아서 마티니를 마실 수 없다”라고 응답했다면 상황은 더욱 발전했을 것이다. 물론 다이애나는 워낙 저돌적이라 키갈부터 하고 보는 매력적인 인물이었기에, 굳이 그런 장치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